영국 고등법원이 해리 왕자를 포함한 유명인 7명에게 상대편 소송비용을 물라고 명령했습니다.
같은 판결을 두고 어떤 기사는 180억 원, 어떤 기사는 653억 원이라고 적습니다.
두 숫자는 성격이 다릅니다. 어느 쪽이 실제로 나갈 돈일까요.
3줄 요약
1. 해리 왕자 등 7명이 소송비용까지 물게 됐습니다
2. 중간 지급금 954만, 청구액은 3450만 파운드
3. 지금 나온 653억은 확정액이 아닙니다
180억은 지금 내는 돈, 653억은 아직 청구된 돈
두 숫자는 단계가 다릅니다. 오는 28일까지 지급해야 하는 954만 파운드, 약 180억 원은 최종 배상액이 아니라 중간 지급금입니다. 영국 민사소송에서 소송비용은 판결이 난 뒤 따로 심리를 열어 항목별로 따져서 정합니다. 그 절차가 끝날 때까지 이긴 쪽이 쓴 돈을 계속 묶어두지 않도록, 일부를 먼저 내게 하는 것이 중간 지급금입니다.
반면 3450만 파운드, 약 653억 원은 데일리메일 발행사 어소시에이티드 뉴스페이퍼스(ANL)가 자기 방어에 썼다고 주장하는 금액입니다. 법원은 이 가운데 얼마를 인정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소송비용 산정을 전담하는 판사가 항목마다 합리적으로 쓴 돈인지 심사하고, 아니라고 판단된 부분은 빠집니다. 653억 원은 청구서에 적힌 숫자이지 확정된 배상액이 아닙니다.
상한선은 없고, 계산 기준은 신문사 쪽에 유리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청구서가 얼마나 깎일 수 있느냐가 남습니다. 매슈 니클린 판사는 여기서 두 가지를 함께 정했습니다. 하나는 ANL이 회수할 수 있는 금액에 상한선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일률적으로 상한을 정하면 불공정할 위험이 있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다른 하나가 더 큽니다. 판사는 ANL의 비용을 '보상 기준'으로 산정하도록 했습니다. 영국에서 소송비용을 계산하는 방식은 두 갈래입니다. 일반 기준에서는 쓴 돈이 사건 규모에 비례하는지를 따지고, 애매한 대목은 청구하는 쪽에 불리하게 봅니다. 보상 기준에서는 비례성 심사가 빠지고, 합리적으로 썼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을 청구하는 쪽에 유리하게 해석합니다. 같은 청구서라도 통과되는 금액이 커집니다. 다만 이 기준에서도 불합리하다고 판단된 비용까지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진 쪽이 이긴 쪽 변호사비까지 무는 나라
한국에서는 소송에서 지더라도 상대방 변호사 비용을 온전히 물어주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영국은 원칙이 다릅니다. 패소한 쪽이 승소한 쪽의 '합리적인' 소송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기본이고, 자기 변호사비는 그와 별개로 따로 냅니다.
원고 7명도 이 위험에 대비는 해뒀습니다. 지면 상대 비용 가운데 최대 1620만 파운드, 약 307억 원까지 보장받는 보험에 미리 가입해둔 것입니다. 그런데 ANL이 내민 금액은 그 두 배가 넘습니다. 만약 청구액이 그대로 인정된다면, 보험으로 가려지지 않는 약 1800만 파운드, 341억 원가량은 일곱 사람이 직접 감당해야 합니다. 소송에 질 경우의 부담에 미리 값을 매겨두는 장치가 영국에는 있고, 이번 사건은 그 값이 빗나갔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보여줍니다.
판사가 문제 삼은 건 패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이 소송의 원고는 해리 왕자와 엘튼 존, 그의 남편 데이비드 퍼니시, 배우 세이디 프로스트와 리즈 헐리, 전 자유민주당 부대표 사이먼 휴스, 인종차별 반대 운동가 로런스 남작부인입니다. 이들은 ANL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개인 정보를 수집해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주장했고, BBC 보도에 따르면 니클린 판사는 지난 7월 7일 그 주장을 모두 기각했습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비용을 물린 이유입니다. 판사는 원고들이 재판 도중 뒷받침할 증거가 사라진 중대한 의혹들을 스스로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으며, "범죄 행위나 중대한 부정행위에 관한 심각한 의혹을 그런 식으로 개인들에게 계속 씌워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고 가운데 누구도 증언에서 부정직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송에서 진 것과, 진 뒤에도 근거가 없어진 주장을 거두지 않은 것은 법정에서 전혀 다르게 취급된다는 뜻입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상한을 두지 않은 판사 본인도 청구액을 곱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3450만 파운드가 "겉으로 보기에도 과도하다"며 실제 지출이 합리적이었는지 "실질적인 우려를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재판에 앞서 법원이 승인해둔 ANL 측 소송비용 예산은 1330만 파운드 선이었는데, 실제 청구액은 그 두 배를 넘습니다.
소송비용 산정을 오래 다뤄온 전직 판사 콜린 캠벨은 이번 명령을 "ANL에 상당한 승리"라면서도 "완승으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판사가 청구액을 그렇게 혹평한 이상 산정 단계에서 깎일 여지가 남았다는 취지입니다.
원고 7명에게는 10월 2일까지 항소를 신청할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KBS 뉴스에 따르면 이번 판결은 해리 왕자 부부의 영국 귀환 소식이 전해진 지 이틀 만에 나왔지만, 금액은 그 발표와 무관하게 재판 절차에 따라 정해진 것입니다. 지금 오르내리는 653억 원은 앞으로 줄어들 수 있는 숫자이고, 최종 금액은 항소 여부와 산정 심리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참고
- BBC, K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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