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밴 시장은 지금 전기차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그 흐름의 한복판에서 올해 상반기 가장 많이 등록된 중형 전기 밴이 한국 차였습니다. 기아의 PV5입니다.
경쟁 상대는 수십 년간 유럽 상용차를 만들어 온 회사들입니다. 후발 주자가 어떻게 이 자리를 차지했을까요.
3줄 요약
1. PV5는 승용차 개조가 아닌 전용 플랫폼 차입니다
2. 상반기 유럽서 1만3116대, 점유율 37%입니다
3. 밴은 성능보다 짐칸 구조로 팔립니다
1만3116대, 그리고 37%
기아의 첫 전용 목적기반차량(PBV) PV5가 올해 상반기 유럽에서 1만3116대 등록됐습니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와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 자료를 기아가 인용해 밝힌 수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이 1위는 유럽 전기 밴 전체가 아니라 C세그먼트 안에서의 1위입니다. C세그먼트는 차 크기를 나누는 구분으로, 밴에서는 소형과 대형 사이에 놓인 중형급을 가리킵니다. 택배 배송이나 소상공인 업무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크기입니다. 이 부문에서 PV5의 비중은 37%였습니다. 세 대 중 한 대 이상이 PV5였다는 뜻입니다.
국가별로는 독일 2206대, 영국 3361대가 팔렸고, 두 나라를 포함한 12개 나라에서 이 부문 1위였습니다. 전기 C세그먼트만 놓고 보면 덴마크 63%, 아일랜드 62%, 스웨덴 59%, 핀란드 58%, 영국 54%로 절반을 넘겼고, 다른 14개 나라에서도 20%를 넘었습니다.
더 눈여겨볼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덴마크·네덜란드·노르웨이·스웨덴 네 나라에서는 전기차만이 아니라 디젤을 포함한 전체 밴 시장에서 PV5가 가장 많이 팔린 밴이었습니다. 스웨덴 1414대, 덴마크 1222대, 네덜란드 1196대, 노르웨이 739대입니다. 같은 기간 유럽 전동화 밴 판매는 1년 전보다 37.5% 늘었고, 전체 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2%에서 13.9%로 올랐습니다.
밴을 고르는 사람은 제로백을 보지 않습니다
승용차를 살 때는 가속 성능이나 실내 마감을 봅니다. 밴은 다릅니다. 짐칸 바닥이 얼마나 낮은지, 좁은 골목에서 몇 번 만에 돌아 나오는지가 하루 열 번씩 쌓여 수익이 됩니다.
PV5가 다른 전기 밴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유럽 시장의 상당수 전기 밴은 기존 차를 전기로 바꾸거나 승용 플랫폼을 상용으로 돌려 만듭니다. PV5는 기아가 PBV 전용으로 새로 만든 플랫폼 E-GMP.S를 바탕으로 개발됐습니다. 적재 바닥 높이를 낮추고 회전반경을 좁혔으며, 차체를 모듈처럼 나눠 화물용(카고)·승객용(패신저)·섀시캡으로 갈라 만들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섀시캡은 운전석과 뼈대만 갖춘 상태로 출고돼, 냉동탑차든 사다리차든 뒤쪽을 사업자가 원하는 대로 얹는 형태입니다.
이 구조는 배터리 자리를 먼저 잡고 그 위에 짐칸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배터리를 끼워 넣느라 바닥이 솟는 일이 없습니다. 휠체어 이용자가 측면으로 타고 내리는 PV5 WAV나 6·7인승 승객용 모델이 빠르게 붙을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기아는 2027년 PV7, 2029년 PV9으로 크기별 라인업을 넓히고 차체 형태를 40종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판매 1위의 원인이 설계 하나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아 유럽 최고운영책임자(COO) 시오르드 크니핑은 "PV5가 판매량뿐 아니라 모빌리티와 비즈니스, 특수 목적 운송 분야에서 새로운 활용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기아의 PBV 전략이 차량과 소프트웨어, 서비스, 소유 방식, 전용 서비스 네트워크를 함께 묶는 생태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차를 잘 만드는 것과, 고장 났을 때 어디서 고치느냐까지 준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상용차를 사는 사람은 후자를 훨씬 무겁게 봅니다.
차를 다 만든 뒤에도 아이디어를 모으는 이유
기아는 8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제5회 PBV 아이디어 공모전을 받고 있습니다. 차를 개조하는 특장 업체, 용품 제작사, 앱 개발사, 사업자, 그리고 일반인까지 다섯 부문입니다. 16개 팀에 총 3500만 원, 대상 한 팀에 1000만 원이 걸려 있습니다.
이미 다 만든 차에 왜 아이디어를 더 받을까요. 앞선 공모전 결과를 보면 답이 보입니다. 휠체어 탑승용 평판과 접이식 전동 램프는 시제품을 만들어 검증한 뒤 산업 전시회에 나왔고, 친환경 종이 차량 용품 15종은 기아샵 에코존 판매를 준비 중입니다. 무선충전 시스템을 로보택시와 연계하는 실증은 추진할 예정입니다. 아직 완성된 사업은 아니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플랫폼이 40종의 차체를 받아낼 수 있어도, 그 40종에 무엇을 얹을지는 제조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냉동탑차에 뭐가 필요한지는 냉동 배송을 해 본 사람이 압니다. 전용 설계의 진짜 값어치는 차 한 대의 성능이 아니라, 남이 만든 것을 붙일 자리를 열어 뒀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파생 모델이 어디까지 가는지는 국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기아와 그린라이트는 돌봄 서비스 기관 17곳을 뽑아 전동화 차량 17대의 구입비를 지원할 예정이고, 그중 3대가 PV5 WAV입니다. 아직 공모가 진행 중이라 최종 선정은 9월 17일 발표됩니다.
참고
- 엠투데이, 주간현대, 매일일보, creator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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