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한 걸그룹 멤버가 유튜브 영상에서 "거제 야호"라고 외쳤습니다.
별 뜻 없는 감탄사였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 뒤 그 도시가 물에 잠기자, 같은 그룹의 이름으로 1억 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습니다.
넉 자짜리 한마디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3줄 요약
1. 원이 고향 거제에 리센느가 5000만 원을 냈습니다
2. 팬덤 모금은 이틀 만에 5700만 원을 넘었습니다
3. 성금 창구는 이름이 아니라 기관으로 확인합니다
미나미가 던진 넉 자
리센느(RESCENE)는 원이, 리브, 미나미, 메이, 제나로 이뤄진 5인조 다국적 걸그룹입니다. 2024년에 데뷔했고, 리더 원이(본명 정원이)는 거제 옥포동 출신입니다.
시작은 지난 3월이었습니다. 원이의 개인 유튜브 채널에 놀러 온 일본인 멤버 미나미가 대화 도중 무심코 "거제 야호"라고 외쳤습니다. 일본어 인사말 "얏호"에 지명이 붙은, 그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SNS와 숏폼 플랫폼으로 옮겨 다니면서 반응이 커졌습니다.
이어진 순서가 흔치 않습니다. 거제시는 지난 5월 리센느를 공식 홍보대사로 위촉했습니다. 지자체 홍보대사는 보통 이미 유명한 사람을 모셔 오는 자리인데, 이번에는 도시 이름이 먼저 유행하고 그룹이 뒤따라 들어온 셈입니다. 위촉 뒤 멤버들은 거제의 관광지를 소개하는 영상 촬영에 참여해 왔습니다.
5000만 원, 그리고 5700만 원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경남 남부에 기록적인 비가 내렸습니다. 거제에는 사흘 동안 900㎜가 넘는 비가 쏟아졌고,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17일에는 시간당 124.5㎜로 관측 이래 1시간 최다 강수량을 기록했습니다. 옥포동의 한 아파트를 산사태가 덮쳐 1명이 숨지고 2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20일 기준으로 214세대 451명이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 수천 세대가 전기와 물이 끊긴 채 지냈습니다.
19일, 리센느 소속사 더뮤즈엔터테인먼트가 거제시청을 찾았습니다. 리센느와 팬덤 리마인(REMINE) 공동 명의로 성금 5000만 원을 전달했습니다.
팬덤은 그전부터 따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리마인은 하루 앞선 18일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전용 모금 페이지를 열었고, 19일 오전에 이미 800여 명이 참여해 4000만 원을 넘겼습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같은 날 오후 4시 기준 모금액은 5784만 원이었습니다. 여기에 리센느를 광고 모델로 쓰는 기업 한 곳이 1000만 원을 보탰습니다. 하루 사이에 1억 원이 넘는 돈이 한 도시로 향한 셈입니다.
물론 이번 수해에 손을 보탠 건 리센느만이 아닙니다. 배우와 프로게이머들의 기부가 잇따랐고, 은행권은 억대 성금과 피해 주민 대출 지원에 나섰습니다. 액수만 놓고 보면 더 큰 기부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5000만 원이 유독 눈에 띈 건, 데뷔 2년 남짓한 신인 그룹의 돈과 팬들의 돈이 한 도시로만 몰렸기 때문입니다.
1위에 오른 건 곡이 아니라 그룹입니다
화제성은 순위표에도 나타났습니다. 아이돌차트가 18일 발표한 8월 2주차(8월 10일~16일) '아차랭킹'에서 리센느가 1위에 올랐습니다. 총점 1만 9794점으로, 2위 에스파(1만 1540점)와 3위 제니(1만 643점)를 앞섰습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이 1위는 특정 곡의 순위가 아니라 음원·유튜브·소셜 점수를 합산한 아티스트 순위입니다. 그리고 세 점수의 크기가 서로 많이 다릅니다. 음원 점수는 1143점인데 유튜브는 1만 371점, 소셜은 8280점이었습니다. 총점의 대부분이 음원 바깥에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이 순위표 하나를 두고 "노래가 그만큼 팔렸다"고 읽으면 곤란한 이유입니다.
곡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2024년 8월 미니 1집 타이틀곡 '러브 어택'이 밈을 계기로 다시 재생되며 음원 사이트 상위권까지 올라간 역주행이 있었고, 리센느는 지난 7월 리메이크 싱글 'Pretty Girl' 활동도 최근 마무리했습니다. 옛 곡의 재조명과 신곡 활동이 겹친 시기라, 어느 쪽이 순위를 얼마나 밀어 올렸는지는 점수만으로 갈라내기 어렵습니다.
보태고 싶다면, 이름 말고 기관을
희망브리지는 17일부터 수해 모금을 시작했고, 이달 31일까지 이어집니다. 희망브리지 누리집에서 참여할 수 있고 ARS와 문자 기부도 열려 있습니다.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한 가지만 짚겠습니다. 특정 가수나 팬덤 이름이 붙은 모금이 화제가 될수록, 그 이름을 빌린 창구도 함께 눈에 띄기 쉽습니다. 리마인의 모금 페이지도 팬덤이 자기 계좌를 연 것이 아니라 희망브리지라는 구호 기관 안에 만들어진 전용 페이지입니다. 돈을 보내기 전에 볼 것은 누구 이름이 걸렸는지가 아니라 어느 기관으로 들어가는지입니다.
넉 자짜리 감탄사 하나가 홍보대사 위촉으로, 다시 1억 원이 넘는 성금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연쇄가 늘 이렇게 굴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우연히 튀어나온 말 한마디가 실제로 누군가의 지붕을 고치는 데 쓰이게 됐습니다.
참고
- 한국일보, 머니투데이, 주간조선, 동아일보, 한국경제, SBS 연예뉴스, 브레이크뉴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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